Veronica Kim 2009. 8. 10. 17:08

 

 

  

 

 의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꿈 보다 해몽이 더 좋다'는 말이 있듯이

제 생각으로는 

문태준 시인이 쓴 '시 노트'가 더욱 기가 막히군요. 

 

 

 

어른의 말씀을 받아 적기만 해도 시가 될 때가 많다.

주름살 사이에서 나온 말씀이기 때문이다.

짧고 두서없이 울퉁불퉁 불거져 나온 말이지만

마늘처럼 매운 맛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어머니가 무심코 던진 말씀으로부터 태어났다.

허리가 아픈 어머니는 앉아 쉴 곳이 눈에 밟혔을 것이다.

어디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허리를 펴고 싶었을 것이다.

이 시가 심상찮은 것은 의자를 내놓을 데를 태연 무심하게

열거하는 어머니의 품 큰 생각에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꽃과 열매와 참외밭과

호박과 망자(亡者)에게도

의자를 내주어야 한다는 그 우주적인 마음 씀씀이에 있다.

공생과 배려에 기초한 이런 모성적 마음씨는

식구를 다 거둬가며 밥을 먹여온 삶의 연륜에서

생겨난 것이리라. (우리의 어머니가 아니라면 누가 인생을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것이라고

먹줄을 대듯 명쾌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정록(47) 시인의 시에는 모자(母子)가 자주 등장한다.

시 '꽃벼슬'에서는 한식 날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를 모자가 찾아간다.

아들은 무덤에 난 쥐구멍에다 꽃다발을 꽂아드린다.

"꽃밥 한 그릇 바치는 것이다".

어머니는 쥐구멍에 술잔을 따르며

"새끼들이 술 갖고 올 줄 알고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있구나"라고 익살맞게 말씀하신다.

아들이 "무덤 안에서 뭔 소리 들려요"라고 너스레를 떨자

어머니는 농(弄)으로 

"그랴 니 불알 많이 컸다고 그런다"라시며

"아예 술병을 쥐구멍에 박아놓는다".

(모자 사이에 오가는 이 능청능청한 대화여.....)

 

이정록 시인의 시는 이처럼 곰살가운

살내가 수북하니 풍긴다.

그의 시를 읽으면 옷 벗고 대중목욕탕에 함께

들어앉아 있는 기분이 든다.

"사랑은 울컥이란 짐승의 둥우리"라고 말하는 그는

안간힘을 쓰며 사는, 몸살 앓는 사람들의

머리맡으로 가 슬그머니 앉는다.

식은땀을 흘리는 자식의 머리맡에서

차가운 물수건을 들고 꼬박 밤을 새던 어머니처럼.

 

그는 시와 삶의 거리를 18.44미터라고 말한다.

(18.44미터는 투수판에서 홈 플레이트까지의 거리이다.)

18.44미터가 곧

"너와 나, 사랑과 이별, 탄생과 죽음의 거리"라고 말한다.

그만큼 그의 시는 삶을 정면으로 팽팽하게 응시한다.

삶에 근거해 삶의 현장에서 그의 시는 발발한다.

 

"내 꿈 하나는 방방곡곡 문 닫은 방앗간을

헐값에 사들여서 술집을 내는 것"

('좋은 술집')이라고 말하는 시인.

가난하고 쓸쓸한 사람들에게 공짜 술도 나눠주고

봉지 쌀도 나눠주고 싶다는 시인.

그는 소년교도소에 가서 한문을 가르치기도 하는

천안 중앙고등학교 교사이다. /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