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시 문학 및 좋은 글

옛날의 그 집, 박경리

Veronica Kim 2008. 6. 30. 12:41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가 마지막으로 남긴 시편 
( '현대문학' 올 4월호 발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