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7월 14일
성 가밀로 데 렐리스 사제
San Camillo de Lellis Sacerdote
St. Camillus de Lellis, C
(Bucchianico (Chieti), 25 maggio 1550 - Roma, 14 luglio 1614)
Born:1550 at Bocchiavico, Abruzzi, kingdom of Naples, Italy
Died :14 July 1614 at Genoa, Italy
Beatified :7 April 1742 by Pope Benedict XIV
Canonized :1746 by Pope Benedict XIV
창설자.병자들의 수호 성인.간호원과 간호 단체의 수호자.
병자들의 봉사자회인 가밀로회의 창설자이신 성 가밀로 데 렐리스는 (1550-1614년)
이탈리아의 복치아니코 출신으로 군인이었다.
그는 터키인을 대항했던 베네치아 전투에 참가했으며,
심한 도박 증세를 이기지 못해 무일푼의 신세로 나폴리 거리를 배회한 사실도 있는 사람이다.
몸이 건강하고 성미가 급했던 그는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는 일이 없던 중
우연한 기회에 설교를 듣고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려고 했지만 다리병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리하여 그는 자신을 극복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병자들을 돌보는 봉사자가 되는데,
이 때에 성 필립보 네리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사제가 되었으며,
마침내 병원 사목을 전담하는 수도회를 창설하기에 이른 것이다.
*성 필립보 네리 사제 축일:5월26일.게시판1182번,1785번.
성인은 죽는 날까지 환자들을 돌보는 헌신적인 삶을 살았는데,
1746년에 시성되었으며, 레오 13세에 의하여 병자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언되어 큰 공경을 받고 계신다.
비오 11세는 가밀로 성인을 간호원과 간호 단체의 수호자로 선언하였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어떤 동료가 쓴 [성 가밀로의 생애]에서
(S. Cicatelli, Vita del P. Camillo de Lellis, Viterbo, 1615)
형제들 안에서 주님을 섬겼다
모든 덕행의 뿌리인 거룩한 애덕부터 시작해 보겠다.
이 덕행은 성 가밀로에게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 덕행이었다.
가밀로는 이 거룩한 덕행으로 불타 올라 하느님만 아니라 이웃도, 특히 병자들을 극진히 사랑하였다.
병자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은 녹아 버리어 세상의 온갖 쾌락과 기쁨을 완전히 잊어버리곤 했다.
환자들을 간호해 줄 때 사랑과 동정심으로 자신을 모두 불살라 버리는 것 같았고,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그들의 병세가 호전되도록 그들의 온갖 질병과 고통을 자기가 기꺼이 짊어지고 싶어했다.
가밀로는 환자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그분을 공경하였다.
그래서 음식을 날라다 줄 때 환자들이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생각하고는
그들에게서 은총과 죄 사함을 청하곤 했다.
자신이 진실로 주님의 면전에 서 있는 듯 환자들을 공경했다.
거룩한 애덕보다 더 자주 더 열렬히 이야기한 것은 없었다.
그는 이 덕행이 모든 이의 마음에 깊이 뿌리박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자기 수도회의 형제들이 이 거룩한 덕행으로 불타 오르도록
그들에게 감미로운 그리스도의 말씀을 상기시키곤 했다.
"내가 병들었을 때 너희는 나를 돌보아 주었다."
이 말씀을 너무도 자주 반복하였으므로, 그것이 흡사 그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가밀로의 애덕은 이렇게도 넓게 펼쳐지어 환자들과 임종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들에게도 긍율과 동정심을 보여 주었다.
그의 마음은 어려운 이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늘 이렇게 말했다.
"이 지상에서 불쌍한 사람을 하나도 찾을 수 없다면,
그들을 도와주고 자비를 베풀 수 있도록 땅속까지 파들어가, 거기에서라도 그들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가톨릭홈에서)
인간의 기준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카밀로는 정말 성인이 될 만 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소홀했으며,
따라서 그는 도박에 지나친 애착을 품은 채 성장했다.
17세에 그는 다리의 질병을 앓게 되었으며 그것은 일생 동안 계속되었다.
그는 로마에 있는 불치병자를 위한 성야고보 병원의 환자이면서 동시에 하인으로 들어갔으나,
싸우기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9개월 만에 해고당하고 3년 동안 베니스 군대를 복무했다.
1574년, 25세 되던 해 겨울, 자기가 가진 모든 것-저축한 돈, 무기, 말그대로 그의 옷에 이르기까지-을
도박으로 날려버린 그는 만프레도니아의 카푸친 수도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수도원장의 설교에 깊은 감동을 받고 그때까지의 생활을 청산했다.
그는 카푸친 수도원의 수련생으로 들어갔으나, 불치의 다리 질환이 재발되어 퇴회하고 말았다.
성야고보 병원에서 한동안 치료를 받은 후 다시 카푸친 수도원으로 되돌아왔으나,
똑같은 이유로 다시 퇴회하게 되었다.
성야고보 병원으로 다시 돌아와 감독자가 됨으로써 그의 헌신은 보상받게 되었다.
1746년에 성인품에 올랐고 1886년에 천주의 성 요한과 더불어 병원,간호원,병자의수호 성인이 되었다.
그는 친구인 성필립보네리의 충고에 따라 사제가 되기 위해 공부했고 35세에 서품을 받았다.
*천주의 성 요한 수도자 축일:3월8일.게시판1026번.1649번.
*성 필립보 네리 사제 축일:5월26일.게시판1182번,1785번.
그는 친구의 충고를 마다하고 성야고보 병원을 떠나 자기 스스로 단체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감독자로서 자신의 모든 시간을 환자를 돌보는 데 바쳤다.
그의 첫째 관심사는 자선 행위였으나,병원의 물질적인 면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환자를 돌보는 사람들의 기술적 능력과 청결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의 단체 회원들은 각 가정의 죽어가는 사람들과
페스트에 감염된 사람들과 죄인들을 돌보려고 자진해서 일했다.
그의 회원 중 몇 사람은 1595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전쟁 때엔 나폴리에서 그와 회원들은
페스트 환자를 실은 배로 달려갔으나 그들을 하선 시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산 채로 매장되는 것을 보고는 회원들에게 죽음이 확실하게 판명된 뒤에도
15분 동안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했다.
그는 일생 동안 다리 질환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마지막 고통중에서도 자신의 침대를 떠나
병원의 다른 환자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어떤지를 알아보고자 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인들은 하느님이 만드신다.
부모는 자기 자녀에게 신앙심을 키워 주어야 하고,
부부는 세례의 은총을 깊게 하기 위해 서로 협동해야 하며, 친구들은 서로서로 도와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노력은 다만 하느님의 섭리에 따를 뿐이다.
우리 모두는 마치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권능만이 하느님의 계획을 수행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를 당신 자신과 같이 만드는 계획이다.
병자들의 간호를 목적으로 세워진 수도회는 현대에 와서 상당한 수에 달하고 있으나
그 발달은 비교적 근대의 일이다.
물론 병자를 도와주는 것은 주님께서 명하신 일곱 가지 자선 사업중의 하나다.
그러므로 옛부터 교회에서는 이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하지 않았지만,
오로지 이런 목적 아래 수도원이 창설된 것은 16세기에 이르러
성 가밀로가 주님의 특별한 성소로 수도회를 창립함으로써 그 시초가 된 것이다.
가밀로는 1550년 5월 25일 이탈리아의 키에티 근처에서 태어났다.
생후 얼마 안 되어 어머니가 사망하고 6세때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으므로
기초 교육도 받지 못하게 되어 노름으로 소일하게 되고 한때는 도박에 미치기도 했다.
그가 19세때 이탈리아와 투르크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물론 그도 일개의 졸병으로서 출정했다.
군인이 된 후에도 악습을 버릴 줄 모르고 그는 받은 봉급으로
친구와 도박을 하다가 결국 옷마저 뺏겨 버린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전쟁에서 중상을 입어 제대는 했으나 여비가 없었으므로
거지 행세를 하며 로마까지 겨우 와서 성 야고보 병원에 입원했다.
사람들은 그의 방종한 생활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상처가 조금 치유되자마자 퇴원시켜 버렸다.
그러부터 직장이 없는 가밀로의 생활은 형편없이 되어 남 이탈리아에 있는 만프레도니아에까지 방랑했다.
마침 그곳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공사가 있었으므로
건축재를 운반하는 마차꾼으로서 겨우 입에 풀칠을 했다.
수도원장은 그를 보통 청년이 아닌 것으로 보았음인지 어느 날 그를 다정하게 타일러 주었다.
가밀로에게도 양심은 있었는지라 마침내 모든 죄를 통회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수련을 받고,
성 프란치스코의 뒤를 이어 성스러운 사람이 되고자 노력을 하던 중,
불행히도 전에 입은 상처가 재발되어 몸이 매우 허약해져 자연히 수도원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성 야고보 병원을 찾아가 상처의 치료를 받는 한편 병자들도 간호해 주었다.
그의 과거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돌변한 태도와 경건한 모습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가밀로는 병자를 간호하던 중에 이에 대한 취미를 갖게 되었고, 이런 사업에 일생을 바칠 결심을 했다.
그런 그의 눈에 몇몇 간호사들은 금전에 팔려 움직이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고
이런 것은 그의 성미에 맞이 않았다.
그는 오직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취지 아래 간호 수도회를 창설할 생각을 하고
그 병원에 있는 몇몇 간호사에게 그 취지를 말하여 4,5명의 동의를 얻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반대했다.
그래서 4,5명의 동지와 더불어 병원을 떠나 티베르 강변에 있는 한 빈민촌에
작은 수도원을 설립하고 각 가정을 방문하며 정성껏 환자를 돌보아 주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육신만을 구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 영혼도 구해 주지 않으면 이는 마치 사람을 그려 놓고 눈동자를 그리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으로
영혼 구원을 위해서는 신부가 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뜻에서 친구인 성 필립보 네리의 충고에 따라 사제가 되기 위해 공부했고 34세에 서품을 받았다.
가밀로 수도회가 지향하는 목표는 다른 수도회와 마찬가지로 청빈, 순명, 정결이며,
그 외에 한 가지 더 서원할 것은 어떠한 환자도 가리지 않고 정성으로 간호해 준다는 것이다.
이 회직은 1586년 교황 식스토 5세의 허가를 얻었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페스트가 유행했다.
그럴 때마다 가밀로 회원들은 각지에서 그 무서운 환자들을 친절을 다해 치료해 주었으므로
이를 보는 사람마다 감탄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정부에서까지 그들에게 감사장을 보내 줄 정도였다.
"저 사람 품에서 죽으면 지옥은 안 간다"고 하며 사후를 두려워하는 죄인들은 앞을 다투어 가밀로를 초청했다.
페스트가 무섭게 만연된 때에는 수사들도 그 병에 감염되어 박애의 천사로서 희생되곤 했다.
가밀로 수도회 제5차 총회 때 그는 총장직을 사임하고 여생을 평수사로 지내다가 큰 사명을 띠고
북 이탈리아 지방 수도회를 순시하던 도중 중병으로 쓰러졌다.
그는 "나는 로마에서 죽고 싶다"고 원해 다시 로마에귀환하게 되었고,
의사의 진단 결과 다시 회복할 수 없음을 알자
"주님의 집에 가자할 때, 나는 몹시도 기뻤다"(시편 122,1)고 대답했다.
그는 1614년 7월 14일에 세상을 떠났으며,1746년에 시성되었고,
1886년에 레오 13세에 의해 천주의 성 요한과 함께 병자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언되었고,
비오 11세로부터는 간호사와 간호 단체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축일:7월14일
성 프란치스코 솔라노
ST. FRANCIS SOLANO
St. Francis Solanus
San Francesco Solano
10 March 1549 at Montilla, diocese of Cordova, Andalusia, Spain
- 14 July 1610 at Lima, Peru of natural causes
Beatified:20 June 1675 by Pope Clement X
Canonized:27 December 1726 by Pope Benedict XIII
Francesco = libero, dall’antico tedesco = free, from the ancient German
프란치스코 솔라노(1549 - 1610)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몬틸라에서 지체높고 독실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예수회의 지도로 교육을 받은 후 20 살 되던 해 작은형제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사제로서 설교와 가난한 환자를 보살피는 데 온 정성을 다 바쳤다.
그의 거룩하고 열성적인 삶의 모습은 모든이에게 감명을 주었다.
한편 그는 아프리카 선교를 지망했으나 남미 선교의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투쿠만 관구, 그란구아이 관구, 차코 관구 등에서 선교했다.
인디안 풍속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인디안에 대한 크나큰 사랑
그리고 음악을 사용한 점 등은 그가 복음을 전파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도움이 되었다.
12 년간을 인디안에 대한 설교가로 활약하고
생애의 마지막 8년간은 페루의 리마에서 사회와 윤리를 개선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하였다.
그는 사부 프란치스코처럼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연도 복종시켰으며
자신이 공경하는 수호성인인 보나벤투라 축일에 천상 생활을 시작하였다.
Saint Francis Solano:
Wonder-Worker of the New World and Apostle of Argentina and Peru
프란치스코는 1549년 스페인의 Cordoba에서 가까운 Montilla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20세가 되던 해 그는 Granada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이 수도원은 총봉사자 Francisco Quinoes에 의해 세워진 Recollection 수도원들 중 하나였다.
프란치스코는 Seville의 수도원에서 공부를 하였고, 1576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의 첫 번째 소임은 수련장이었다. 그는 그 때 Sierra Morena에 있는 수도원 수호자(원장)직을 수행하였다.
이 시기 동안 그는 역병의 희생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였다.
그 후 그는 설교가가 되어 병자들과 죄수들을 위해 일하는 데 온힘을 다하였다.
해외 선교의 소명을 느낀 그는 아프리카로 갈 허락을 청하였지만 아프리카가 아니라 남미로 파견되었다.
1589년 2월 28일 그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Sanlucar di Barranmeda를 떠나 남미로 향하였다.
이 형제들은 대서양을 건너 콜롬비아의 Cartagena에 도착하였다.
프란치스코는 걸어서 파나마 지협을 건너 남쪽 페루를 향해 여정을 계속하였다.
바다를 건너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위험스런 일이었다.
그는 심한 폭풍으로 인해 태평양의 외딴 섬에서 난파되었다.
형제들은 어떤 배를 만나 여행을 계속하여 페루의 Paita에 도착하였다.
프란치스코는 Lima로 계속해서 내려갔다.
그의 원장은 그를 파라과이의 Tucuman과 북 아르헨티나로 보냈다.
그는 1590년 이들 지역에 도착하였다.
그는 스페인의 정복자들에 대항해서 인디오들의 권리를 충실하게 변호해 주는 사람이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종종 원주민들의 재산을 강탈해 가고 그들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1592년 프란치스코는 Tucuman 선교단의 수호자(Custos)로 임명되었다.
그는 리마의 수도원 수호자로 되돌아갈 때인 1595년까지 이 선교단에서 일하였다.
그는 늘 설교하는 데 적극적이었으며, 착취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예언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608년 그의 건강이 아주 나빠져서 리마에 있는 요양소에 입원하였다.
프란치스코는 1610년 7월 14일 리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클레멘스 5세는 1675년 프란치스코 솔라노를 복자품에 올렸고, 베네딕도 8세가 1726넌 그를 시성하였다
(작은형제회홈에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1403번,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거룩한 상흔(오상)축일:9월17일.게시판1369번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축일:7월15일.게시판.127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Legend of St Francis: 11. St Francis before the Sultan (Trial by Fire)-GIOTTO di Bondone
1297-1300. Fresco, 270 x 230 cm. Upp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간추린 프란치스칸 영성
복음적 그리스도 중심적 영성|사도적 선교적 영성|작음과 형제애의 영성
사도적 선교적 영성
프란치스칸 영성의 두번째 측면은 사도적이고 선교적인 영성이라는 것이다.
생활양식 자체가 복음서의 예수와 사도들의 삶에서 비롯한 것이기에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 모든 계층의 크리스챤에게 개방된 영성
2. 교회 안에서의 영성
3. 삶의 영성
4. 선교적 영성
선교적 영성
교회 안에서 교회의 사명에 이바지하도록 불리움받은 작은 형제들은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인 선교에로 열려있기 마련이다.
프란치스꼬 역시 초기부터 이러한 선교적 열정에 북받쳐 수차례에 걸쳐 선교여행을 떠났으며,
순교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특별히 당시 그리스도교와 가장 적대적이었던 이슬람교도들을 한 형제로 받아들이고
화해의 사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코자 하였다.
그 결과 성지탈환의 이유로 십자군 전쟁이 수차례에 걸쳐 일어나고 있던 상황에 그는
동방으로 건너가 홀몸으로 이슬람의 술탄을 만나 평화와 화해의 정신으로 한 형제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성지 이스라엘은 작은 형제들의 배타적인 선교지로 사도좌는 인정하고 있고,
회교도들도 작은 형제들만을 로마교회의 공식적인 대표자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사부요 스승의 선교적 모범은 작은 형제들의 마음과 역사 안에서 늘 살아 숨쉬고 있다.
이러한 선교적 열정의 덕분으로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그리스도교와 프란치스카니즘을 심어왔고
또 오늘날에도 아프리카, 러시아, 중국, 태국 등 선교 프로젝트들을 활성화시키고 있다.
프란치스칸 성소는 본질적으로 선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14th Station - The Way of the Cross in Jerusalem
프란치스코 회원인 그는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에서 태어났고, 1589년에 페루의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가 타고가던 배가 폭풍우를 만나 포기해야 했으나,
그는 몇몇 흑인 노예들과 함께 끝까지 배를 지키려고 하였는데,
결국에는 그 노예들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건지는 경험을 하였다.
그는 남 아메리카의 여러 지역을 다니며 인디안들 가운데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으나,
어떤 유럽 성집자답지 않게, 각 지방의 토착 언어를 열심히 배웠으므로,
그는 언어의 특은을 입은 사람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604년, 그는 리마의 어느 시장에서 그 도시의 부패상을 폭로하는 설교를 하였는데,
그 설교가 너무나 강력하였으므로 주민들이 크게 동요하였다.
시당국은 그 지바의 대주교에게 공식 항의하였고, 그는 군중들을 진정시켜야 하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거의 20년 동안 인디안과 스페인 정복자 사이를 오가며
피나는 노력을 경주하여 훌륭한 수도자의 상을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필립 4, 4) 하신 성 바오로의 말씀과 같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기쁘게 찬미가를 부르며 하느님의 덕을 찬미했다.
그래서 "명랑한 주님의 가수"라는 별명까지 있었다.
그러면 그 영적(靈的) 자손에 해당하는 프란치스코회원들 중에
다소라도 그와 같이 명랑한 이가 있다는 것은 지당한 일인데,
그 중에서도 사부(師父)와 같은 이름을 지닌 성 솔리노 수사야말로
그 명랑한 성격면에 있어 아시시의 성자와 극히 닮은 바가 있었다.
그는 1549년에 스페인의 알달루시아에서 태어났다.
그 양친은 물질적으로는 그리 혜택을 받지는 못했었으나,
영신적으로는 매우 풍부한 덕을 지닌 경건한 분들이었다.
그의 장남인 솔라노는 어려서부터 주님의 총애를 받은 아이였다.
그 일례를 들어서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두사람이 서로 싸우다 결국 칼을 빼어 결투를 하게끔 되었다.
이것을 본 솔라노는 그들 사이에 끼어 들어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도 원수를 용서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아저씨들도 서로 참고 서로 나쁜 것을 용서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아저씨들도 서로 참고 서로 나쁜 것을 용서해 주면 되자 않아요?"하고 반울음으로 말했다.
아무리 혈안이 된 그들이라도 상대자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란 것과,
그리고 그들의 어른답지 못한 태도를 어린아이 앞에 보인 것이 부끄러웠던지,
그들은 칼을 던져 버리고는 서로 화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청년이 된 솔라노는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매우 적합한 곳이었고,
세속에서도 뛰어난 신앙을 가졌던 그는 수도원에서도 역시 동료 중에서
뛰어나게 수덕의 길로 나아갔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엄격한 극기 생활에서도 극히 명랑한 성격을 잃지 않았다.
그의 봄 날씨와 같은 온화하고 명랑한 태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주었다.
그가 사제가 된 지 수년 후의 일이다. 나라 안에는 악성 페스트가 창궐했다.
물론 수사들은 다들 이 가련한 환자 간호에 동원되었다.
그중에도 제일 기쁜 마음으로 이 위험한 자애 서업에 헌신한 이는 바로 이 프란치스코 솔라노였다.
자기를 잊고 오직 가련한 환자들을 위해 정성껏 일을 하던 중 자신도 그 병에 감염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곧 회복되었고, 그 후는 더욱 더 열심히 환자를 도와주며 그 영혼 구원에 힘썼다.
과연 그의 노력으로 영원한 행복을 차지하게된 죄인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자기를 이기기 위해
더러운 나병 환자에게 친구했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다 알고 있다.
그처럼 솔라노도 어느 날 종기가 많이 난 소년을 만났다.
사부의 덕을 본 받으려는 그는 그 고름이 흐르는 더러운 아이르 용감하게 껴안고 그 상처에 친구해 주었다.
그렇게 하니 이상하게도 그 아이의 종기가 하나 하나 살속으로 사라지고 아무 흔적도 없이 완쾌되었다 한다.
이 기적으로 인해 솔라노의 명성은 자자했다.
그러나 겸손한 그는 이것이 매우 마음에 부담이 되어 세인들에게 망각되기를 갈망하고,
1576년에 산간벽지에 있는 어떤 수도원에 지망해, 그곳에서 수련장으로 지원자들을 수련시켰으나
이에도 그는 만족치 못하고 다시 아프리카로 향해
그곳에서 일개 선교 신부로서 평생을 마치기 위한 허락을 원장에게 �했다.
그런데 원장은 그가 지망하는 아프리카에 보내는 대신,
발견된 지 불과 90년도 안 되는 남아메리카에 파견해 우선 페루 지방에서 전교를 하도록 했다.
거룩한 공명심에 가득 찬 솔라노는 즉시 정든 부모 형제와 이별하고,
오직 미사 경본과 바이올린 하나만을 가지고 용감히 신대륙을 향해서 떠났다.
그때는 지금과 달라 작은 범선으로 남미에까지 장도의 항해를 하는 것이었으므로
도중에서 겪은 위험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특히 그가 파나마에서 페루에 이르는 사이에 여러번 조난을 당해,
배가 바위에 부딪치고 곧 침몰 당할 처지에까지 이르렀으나
다행히 솔라노의 기도로 인해 그 참사를 면하고 무사히 수도 리마에 도착할 수 가 있었다.
솔라노는 그 후 페루 북부인 독만 지방에 가서 원주민을 상대로 전교를 시작했다.
그는 다른 스페인 사람들이 그들을 대하듯이 결코 권총이나 소총이나 칼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몸에 거친 옷을 입고 맨발로 그들 앞에 나타나 그가 좋아하는 바이올린을 켜서
원주민들을 기쁘게 해 줌으로써 그들의 경계심을 없애고,
그 뒤 그들에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의 가르침을 설명해 주었다.
그의 태도나 그의 어조는 모두 사랑에 충만되었고 온화함뿐이었다.
이에 원주민들도 그에게 감화되어 세례를 받는 자가 속출했다.
게다가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기적을 행하는 은혜까지 주셨다.
이리하여 어떤 때는 영세자가 8, 9천 이나 되었다.
그 기적의 수를 대강 추려보면 이러하다.
첫째로 그가 신부로서의 강복을 주었을 때 죽은 자가 살아났던 일과,
셋째로는 각각 언어가 다른 원주민들에게 한 가지 말로 강론했으나 저들은 자기 말로 알아들었다는 일과,
넷째로 메뚜기 떼로 모든 농작물이 전멸될 때에 십자가를 그음으로써 격퇴시켰다는 사건과,
다섯째로 큰 가뭄때 메마른 땅에 샘이 솟아나게 했던 일,
여섯째로 맹수도 그의 앞에서는 양과 같이 온순해졌다는 사건이다.
그러니 교황 클레멘스 10세가 그를 "신세계의 기적자"로 칭찬했던 것도 지나친 찬사가 아니다.
그래도 그는 절대로 교만하지는 않았다.
그의 마음에는 ’하느님께 찬미가 있어지이다." 오직 이것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런 능력을 주셔도
오히려 자신을 낮추며 어려운 고행과 열렬한 기도로써 일관했다.
이럴수록 이것은 하느님의 풍부한 은총을 이끄는 힘이 되었다.
솔라노는 원주민들에게 신앙을 심어주는 한편,
수도 리마에 거주하는 스페인 인들에게 열변을 토하여 그들의 불신을 책망했다.
"구약 시대의 의인 나는 니느웨 시민의 타락을 규탄하며,
지금이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무서운 천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 했다.
다행히 그 시민들은 그의 경계를 잘 들었으므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지금 당신들도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후일큰 지진을 면치 못할 것이요,
그 멸망의 비참함을 보리라"하고 말했다.
리마 시민들은 그의 훈계에 순종하여 화를 면했지만, 톨쿠시로 등의 시민들은 완강히 솔라노의 예언을
무시했으므로 18년 후 큰 지진을 만나 비참한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
하여간 솔라노가 대성공을 거둔 것은 단지 그의 기도의 정신이었고
또한 그의 하느님과 성모께 대한 열렬한 사랑의 결정이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이 두분은 가끔 솔라노에게 나타났고,
심지어는 그의 사도적 활동에 대한 친절한 가르침도 전해 주셨다는 것이다.
솔라노는 자기 자신도 보살피지 않고 하느님께 봉사하기 21년,
피로로 인해 병석에 눕게 되어 1610년 7월 14일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최후의 말은 그의 전 생애의 모토인 ’하느님께 찬미가 있어지다"라는 구절이었다.
장례식에는 그 나라의 부왕(副王)과 리마의 대주교를 위시해 많은 신부, 수도자,
일반 신자와 원주민들까지 참여해, 마치 한나라 원수의 장례식과 같았다.
그의 전구로 인해 이루어진 기적은 생전의 갑절이 되었다.
그래서 사망 후 불과 47년만에 복자위에 오르고, 1726년에 성인품에 올랐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축일:4월17일(7월14일)
복녀 카테리 테카크위타
Blessed Kateri Tekakwitha
Beata Kateri (Caterina) Tekakwitha
(Catherine Tekakwitha; Lily of the Mohawks; Tegakouita; Tegakwitha)
Born:1656 at Osserneon (Auriesville), modern New York, USA
Died:17 April 1680 at Caughnawaga, Canada
Venerated:1943
Beatified:22 June 1980 by Pope John Paul II
Canonized:pending
이로꽈 인디언들에게 체포된 알곤퀸의 딸인 카테리 테카크위타는 오호크 인디언 추장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1676년에 예수회 선교사인 쟈끄 드 랑베르빌 신부에 의하여 크리스챤으로 개종하였으나,
그녀의 새로운 종교 때문에 부족과 친척들의 질시와 학대를 이기지 못하여 고향을 떠났다.
밀림지대를 거쳐 200마일의 거리를 헤맨 끝에 몬트리얼과 가까운 어느 크리스챤 인디언 마을에 당도하였다.
그녀는 1677년 성탄절에 첫 영성체를 하였고, 1679년에는 정결서원을 발하고 그리스도께 자신을 봉헌하였다.
그녀는 카나다의 코그나와가에서 선종하였는데, 그녀의 성덕이 뛰어나 만인의 공경을 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녀는 [모호크족의 백합화] ’Lily of the Mohawks’ 라고 불리며,
1980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에 의하여 시복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여성의 존엄 (Mulieris Dignitatem)
요한 바오로 2세. 1988년 8월 15일
마리아의 해에 즈음하여 발표한 여인의 존엄과 소명에 관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권한
인류가 매우 심각한 변화를 겪고 있는 이 시기에
복음의 정신으로 무장된 여성들이 인간성의 상실을 막는 데에 대단한 공헌을 할 수 있다
부활의 첫 증인들
16. 그리스도의 선교 시작부터 여자들이 그분과 그분의 신비에 여성특유의 감수성을 보인다.
이 사실은 빠스카 신비, 곧 십자가와 부활 새벽에 있었던 사건에서 다시 명백하게 확인된다. 여자들이 제일 먼저 무덤에 도착한다.
그들은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먼저 발견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다. 전에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마태 28,6)는 소식을 접하는 첫 사람들이 된다.
그들은 예수님의 발을 붙잡는 첫 사람들이다.(마태 28,9 참조).
그들은 또한 첫 번째로 사도들에게 이 진실을 알려 줄 임무를 맡는다.(마태 28, 1-10, 루가 24, 8-11 참조).
요한복음(마르 16,9도 참조)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특별한 역할을 강조한다.
그 여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첫 증인이다. 처음에 그 여인은 그분이 동산지기인 줄로 착각하였다.
"예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예수께 돌아서서 히브리어로 ’라뽀니’하고 불렀다(이 말은 ’선생님이여’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가라.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 곧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 하고 일러주셨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만나 뵌 일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일러주신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6-18).
이리하여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사도들 중의 사도"라는 칭호로 불려져 왔다.
그 여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첫 목격 증인이 되었고 이 때문에 사도들 앞에서 첫 증언도 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어떤 의미에서 전에 언급했던 대로 그리스도께서 남자들에게 신적 진리를 위탁했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예언자 요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나는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아들과 딸은 예언을 하리라"(요엘 3,1).
예수 부활 후 오십 일째 되는 날에, 이 말씀은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빠라끌리또 성령께서 내려오실 때 다시 한번 확인된다(사도 2,17 참조).
여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태도를 언급한 이 모든 말씀들은 성령 안에서 남녀 평등의 진리를 확인하고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남자와 여자는 분명 둘 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평등할 수 밖에 없다.
둘 다 성령 안에서 쏟아 부어지는 신적 진리와 사랑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남녀 모두가 그분의 구원적이고 성화적인 "방문"을 받는다.
이 성스러운 방문 앞에 남자나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아무런 제약을 주지는 못한다.
그것은 성 바오로의 말대로 인간 안에서의 성령의 구원적 활동이 유다인으로 태어났거나 그리스인으로 태어났거나,
자유인의 지위를 누리거나 노예 신분에 처해 있거나에 구애되지 않는 것과 똑같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갈라 3,28).
이 결합은 다양한 자원 안에서 일치를 가져오시는 성령께서 "너희 아들들이 예언을 하리라." 와
"너희 딸들이 예언을 하리라."는 사실에 똑같은 방법으로 기여하실 것이다.
"예언을 한다."는 말은 남녀 각개 인격체의 진정한 모습과 독창성을 보존하면서 인간의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께서 하신 큰일들"(사도 2,11)을 표현한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 하신 큰일들"에 대한 복음적 평등성, 남자와 여자의 평등성은 나자렛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안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났는데,
바로 이 평등성이 교회와 세상 안에서 여성들의 존엄과 소명을 위해 가장 확실한 기초를 제공한다.
모든 소명은 인격적이고 예언자적으로 심오한 의미를 지닌다. 이런 식으로 이해한 "소명"안에서 인격적으로 여성적인 요소가 새로운 차원에 도달한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큰일들"의 차원으로서 그 안에서 여성은 생동력 있는 주체가 되고 대체 될 수 없는 증인이 된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홈에서)
낯선 북소리 세상에서 자기만 한 발짝 떨어져 나온 것 같은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있는가? 친구며 가족들과는 다른 길로 가고 있다고 느껴 본 적이 있는가? 수필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들과는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하였다.
미국 독립 전쟁 전 모호크족의 족장과 알공킨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카테리 테카크위타에게 들린 북소리는 부족의 전통과는 다른 리듬을 갖고 있었다. 모호크족의 전통에서는 여자가 결혼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테카크위타는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고 자신의 일생을 하느님께 완전히 봉헌함으로써 부족의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난 길을 걸었다.
그는 기도하고 자선을 베풀고 참회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는데 이런 비전통적인 삶의 방식 때문에 가끔 위험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겪어야 할 가난은 두렵지 않다. 나는 약간의 양식과 걸칠 수 있는 옷 한 벌이면 충분하다.”라고 말했다.
카테리 테카크위타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예상을 깨뜨려야 할 때도 있음을 보여 준다.
먼 곳에서 희미하게 낯선 북소리가 들려 오면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라. 다른 사람이 내 진로를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중이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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