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서양 미술

Marc Chagall

Veronica Kim 2008. 10. 19. 17:21

Marc Chagall

마르크 샤갈

  



The Fiddler, 1912-1913

바이올리니스트

 



Marc Chagall, I and the village

 

 

나와 마을

 

파리에 나온 샤갈이 처음엔 고갱의 원시적인 생명력에 감화를 받기도 하고,

고호의 정적인 표현 특성에 영향 받기도 했으나, 곧 입체파적인 화면 분할기가 시작되어

이 작품을 그린 해부터 3년간 그런 작업 계속된다.

이 작품도 그의 마음 속에 깊이 꿈 비틀거리고 있은 추상의 이미지를

원과 삼각, 사각형의 기하학적 구성을 통해서 평면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점은 그러한 화면 분할의 수법과,

나와 마을의 거리를 이렇게 친밀화시켜 보여주는 심정에 의한 또 다른 질서의 힘이다.

그 힘은 소와 나를 같은 원 속에 접근시켜 과거와 현의 나를 일체화시키며,

나의 얼굴빛을 푸른색으로 한 것은 후의 <일곱 손가락의 자화상>과 같이

물리적 중심과 다른 중심을 가진 별세계에 상응하게 하기 위한

필연의 변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검은 장갑을 낀 피앙세

 

6년 후 샤갈의 아내가 될 벨라 로젠펠드를 그린 초상 화이다.

이 해에 처음으로 벨라를 그때까지의 여자친구 테아의 소개에 의하여 알게 되어,

그의 영원한 반려자로의 한 여성상을 이 유태 여성으로부터 찾게 되고,

그 선택의 순간을 기념하기 한 초상화로 그려졌다.

"돌연 나는 느꼈다. 내가 살아나갈 길은 테아와 함께 라는 것을! 벨라만이 내 아내라는 것을."

샤갈은 바로 전년에 테아를 모델로 한 <빨간 나무>를 거친 표현주의적 묘법에 의하여 그린 것이 있었으나,

그것을 청산하고 이 작품에서는 엄격하고 부드러운 감정이 서로 융화하듯 한,

샤갈의 독자적인 여성미 표현에 있어 최초의 기념할 만한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까만 배경 앞에 하얀 의상, 그리고 까만 장갑의 대조에서 기품 있는 화면을 느끼게 된다.

 

 



하양과 나의 벨라 Marc Chagall. Bella with white collar 1917

 

 

샤갈의 그림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 벨라였다.

샤갈은 그녀의 이미지를 그리기를 늘 즐거워하였다.

 

 



젊은 날의 샤갈

 

 

샤갈과 벨라

 샤갈보다 아홉 살 어린 벨라는 보석상을 하는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해마다 여름이면 어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다녔을 정도로 부유한 집안이었다.
샤갈이 스물 두 살
 때 고향 마을의 여자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마침 그 집을 방문한 벨라와의 첫만남이 이루어졌다.

 

벨라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가장 먼저 그의 마음을 끌었다.
아직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녀였지만,

                                                         그 순간 샤갈의 마음은 여자친구로부터 멀어져 곧바로 벨라에게로 갔다.

 "그녀의 침묵은 내 것이다. 그녀의 눈은 내 것이다. 
 
그녀는 마치 아주 오래 전부터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소년 시대도, 현재의 나도, 나의 장래도 모두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처음 그녀를 만났는데도 그녀가 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벨라야말로 내 아내가 될 사람임을 알았다. 그녀의 청백색 얼굴과 눈,

특히 그 눈은 크고 동그랗고 까맸다! 그건 바로 내 눈이다. 내 영혼이다."


                                            반면 소녀 벨라가 본 모습은 엉클어진 곱슬머리가 수술처럼 눈썹과 코 위까지 늘어지고,

피부는 천국에서 지하로 온 사람처럼 파랗고 체구는 가늘고 긴,

다른 사람과는 뭔가 다른 눈동자를 가진 청년이었다.

 '침묵의 공주'라 불렸던 벨라는 "나는 항상 꿈을 꾸었어요.

언젠가는 반드시 어느 화가에게 마음을 뺏길거라고 .

그 사람은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면 안 되었죠"라고 운명적인 만남을 회상했다.



La Mariée, 1950. Gouache pastel.

 

 

 벨라는 당시 모스크바에서 배우수업을  받고 있었으나 샤갈과 결혼하면서 자신의 꿈을 버렸다.
그녀 부모로선 결코 환영할 수 없는 결혼이었다.
그러나 내성적인데다 말까지 더듬고 종종 간질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던 샤갈에게

벨라는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반려자였다.
 

 벨라는 샤갈 작품의 완성을 확인하는 판정자였으며 제목을 고르는 일도 했다.

내성적인데다 말까지 더듬고 종종 간질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던 샤갈을 지켜주는 사람은

적절한 판단력과 직관을 가진 벨라였다. 샤갈보다 아홉 살이나 적은 나이였지만

벨라는 마치 어머니같은 포용력을 지닌 존재였다.

 샤갈 가족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벨라는 낯선 타향 땅에서 전염병으로 숨을 거뒀다.

전쟁 중이라 대부분의 약이 최전선용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작품세계의 여신이며 인생의 동반자인 벨라를

갑자기 잃은 샤갈은 9개월 동안이나 붓을 들지 못할 정도로 깊은 절망에 빠졌다.  

벨라를 잃은 후 한 동안 샤갈의 화면은 깊은 푸른색이 지배한다.

후에 이 푸른색은 정제되고 단련되어서 가히 "샤갈의 푸른 색"이라 할

맑고 환상적인 색채에 이르게 됐다. 

 

벨라가 세상을 떠난 뒤 샤갈은 깊은 슬픔으로 그림도 그리지 못했다.

 

         

Marc Chagall. (French, born Belarus. 1887-1985). Maternity. (1912).

Gouache on paper, 10 1/2 x 7" (26.6 x 17.8 cm).

Bequest of Mrs. Helen Serger in honor of William S. Lieberman.

© 2006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ADAGP, Paris

 

 

아이를 밴 여자

 

화면의 지평선을 아래로 내릴 수 있는 데까지 내리고,

넓은 하늘을 배경으로 아기 예수를 속에 가진 성모가 우뚝 섰다.

18세기까지 러시아에 전해 내려오는 이콘 (聖像)의 전통으로,

아기 예수를 원형이나 타원형의 테두리 속에 넣어

성모의 뱃속에 투시시켜 그리는 것은 넓게 알려진 일이지만,

샤갈은 이 작품 속에 그 전통을 현대적 성상으로 그렸다.

태아 주변에 그려진 타원 속의 소우주와 성모를 둘러싸고 있는

외계와의 교감이 샤갈의 분명하고 우아한 필법에 의하여 잘 표현 되어 있다.

입체파인 화면 분할법은 차츰 화면에서 오히려 내적으로 샤갈의 조형적 의도에 순화되어

공간을 더욱 깊게, 크게 설정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성모의 표정이나,

스카프, 치마 등에서 보여지는 세속성은 오히려 속(俗)과 성(聖)의 접근을 느끼게 한다.

 

 

 

 

썰매와 마돈나

 

벨라가 죽고 난 이후 몇 점의 작품에서 샤갈의 색채가 얼마나 투명하며 깊이 있고,

아름답게 발색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그의 내면 속에 깊이 깔린 슬픔을 그가 얼마나 알뜰하게 소화하며,

정화시키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이 작품에 있어서도

화면의 부분을 메운 투명한 푸른색 속에 몇 가지 드러낸 강렬한 대비색이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샤갈이 돌연 화면에 매를 그리게 된 것은

어느 친구의 '천야일야(千夜一夜)'의 삽화를 경험에서라 한다.

어쨌든 그의 즐겨 쓰는 나선구에 의하여 두 갈래로 갈라진 모자의 하강과

썰매와 말의 상승운동을 통하여 어떤 리얼리티와 결합한 점에서,

이 작품은 깊은 의미를 지닌다.

썰매를 타고 가던 마돈나는 상승하는 썰매에서 떨어져 땅에 떨어지고 있다.

 

 



Bride with a Fan, 1911, oil on canvas, collection of Pierre Matisse, New York

 

샤갈의 매니저 역을 하던 딸 이다는

아버지가 혼자 고독하게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아 여인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그 후 '바바'라는 여인에게 매료된 샤갈은 자신의 마지막 30년 인생 동안

그녀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어 한층 더 성숙해진 작품들을 남겼다.

 



Adam and Eve, 1912

 

아담과 이브

 

이 작품 샤갈의 작품 중에서 면을 가장 세분화한 작품 일 것이다.

당시 그는 벽에 세잔의 복제화를 몇 장이나 붙여 놓을 정도

세잔의 만년의 입체파의 모체가 된 조형 이념을 동경하였고

"우리들은 모두 세잔에서 출발했다."고 고백한 레제, 브라크에 가장 심취해 있었다.

일찍이 제작을 통해서 다양한 형태의 기하학적인 해체를 철저히 파고들려고 결의하고 있었던 것을

이 작품을 통해서 추측할 수가 있다. 이 작품은 형태가 그렇게 세분화되어도 유동적이고,

음상이 또렷 또렷한, 마치 바하의 토카타를 듣는 것처럼 장엄하다.

이러한 수법은 후일 렝스 성당이나 메쓰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제작에 되살아난다.

샤갈의 다른 작품에도 그러하지만,

인물의 표정에 있어서 음산한 면은 금단의 열매를 딴 악의 주 제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푸른 서커스

 

1924년부터 샤갈은 서커스를 통하여 많은 그의 심중을 이야기하려는데 열중해 왔다.

그는 그 주제를 때로는 많은 팟슈로, 혹은 아크와틴트의 판 형식으로, 또 유화로 많은 경험을 했고,

또한 서커스는 그의 화면 공간을 그만큼 자유롭게 설정하는데 성공적인 주제이기도 했다.

그의 화면에는 <초록 눈의 집> 이후 자주 선량하고 우수에 찬 눈이 등장하고,

또 물고기가 등장한다. 투명도가 높은 푸른색 속에 그가 항상 그려오던,

이미 그에겐 일상성을 지닌 여러 형상들이 물 속에 잠기듯 깔려 있다.

그리고 그 표면에는 빨강과 노랑, 초록들이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푸른색과 대화를 하고 있다.

그는 이후, 이 몽상적이며 환상적인 랍소디 인블루에 의하여 연인들의 로맨스를 물들일 것이다.

 

 

                                                                             Marc Chagall (Mark Zakharovich Shagal) (1887 - 1985)

 

러시아 출신 유대계 프랑스 화가. 비텝스크 출생.

고향마을의 미술학원에서 배운 뒤, 190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왕실미술장려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듬해에는 L. 박스트의 미술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유럽근대미술에 관한 지식을 배웠다.

1910년에 파리로 가서 1914년까지 머물렀다.

그 사이에 A. 모딜리아니·C. 수틴·J. 들로네 등을 알게 되었고,

시인 B. 상드라르·G. 아폴리네르 등과도 친분을 맺었다.

또 1911년의 앵데팡당전에 첫 출품을 하고,

1914년에는 베를린 데어슈투름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지기 위해 독일을 방문,

그 길로 고향에 돌아왔으나,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로 그대로 러시아에 머물렀다.

 

 


 

1915년 벨라 로젠펠트와 결혼하였는데,

이것은 샤갈 작품의 중요한 영감(靈感)의 원천이 되었다.

1917년 10월혁명이 일어나자 비텝스크지역 미술위원에 임명되었으며,

미술학교를 창설하였다. K. 말레비치와 E. 리시츠키를 교수로 초빙하였는데,

말레비치와의 의견대립으로 1919년 위원직에서 물러난 후,

모스크바로 옮겨 국립유대극장의 벽화를 그렸다.

1922년 베를린, 이듬해에는 파리로 돌아가서 화상 A. 볼라르의 의뢰로

N. 고골리의 《죽은 혼》의 삽화에 손을 대는 등

차츰 파리의 유력한 화가로서 주목을 받는 동시에,

환상적인 작풍은 초현실주의자들로부터 높이 평가되었다.

 

1941년 뉴욕근대미술관 초청으로 미국으로 가서,

제2차세계대전중에는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보냈고,

발레 의상과 무대장치를 담당하였다.

1947년 파리로 돌아갔으며 1950년에는 남프랑스 방스에 머물렀다.

1952년 V. 브로드스키와 재혼, 20세기 회화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제작활동의 폭이 넓어 유채·구아슈·판화, 파리 오페라극장의 천장그림,

예루살렘 하다사병원의 스테인드글라스, 그 밖에 조각·도기·무대장치에까지 미치고 있다.

개인적이며 자전적인 내용, 러시아에 대한 향수, 유대인 특유의 전통과 상징에 대한 경애 등

그의 작품의 기조(基調)는 초기에 이미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파리에서 색채의 발견, 입체파의 영향, 상드라르나 아폴리네르 등 전위시인과의 접촉은

그의 예술에 새로운 자양분이 되었다.

색채와 형태에서 자연주의적인 사고방식에 구애받지 않고, 이미지를 시적으로 구성하였다.

입체파의 경향은 곧 색채가 넘쳐흐르는 보다 자유로운 스타일로 전환되었고,

그 뒤 그의 환상적 우의표현(寓意表現)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샤갈미술관에 《성서의 메시지(1969∼1973)》 작품군이 있다.

 



The Soldier Drinks, 1911-12, oil on canvas, The Solomon R. Guggenheim Museum,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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