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런 저런 이야기

의사 장기려

Veronica Kim 2009. 3. 8. 15:53

  


  
      • 의사 장기려(1911-95). 한 평생을 아름답고 올 곧게 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천생연분의 배필과 생 이별한 채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삶은 더욱 그렇다. 한국의 슈바이처, 바보 의사…. 그를 가리키는 별명은 수 없이 많다. 가난한 환자의 치료비를 자신의 월급으로 대신 내 주고. 입원비 낼 여력이 없는 환자를 몰래 도망치게 해준 이. 며느리가 혼수로 해온 이불을 춥고 배고픈 고학생에게 건네 준 의사. 상상을 넘어서는 무욕의 생활은 때로 그를 바보로 만들기도 했다. 생전에 그는 “나는 간디에 비하면 너무 가진 게 많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그의 호 ‘거룩한 산(성산)’조차 그의 아름다웠던 삶을 담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아름다운 사람은 세월을 넘는 감동을 선사한다. 지고지순한 사랑의 표본으로 불렸던 이광수의 소설 ‘사랑’ 의 주인공인 안빈의 실제 모델이었던 장기력 박사. 그의 실 생활은 소설보다 더욱 극적이고 지고지순했다. 김일성의대 외과과장이었던 그는 6.25로 아내와 헤어져 월남한 뒤 평생독신으로 지내며 함께 월남했던 둘째 아들을 인술을 실천하는 의사로 키워냈다. 오직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했고 이웃을 사랑했다. “사람만큼 추한 것은 없다. 그러나 신을 빼고 사람만큼 신성하고 위대한 것은 없다”고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그는 자신이 지닌 의술 하나로 타자를 위한 열린 삶을 실천했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줬다. 그의 삶은 이 시대 수많은 의사들과 비교된다. 아내없는 살림에 차남 장가용 박사를 훌륭하게 성장시킨 일. 무료 천막병원을 운영하며 현 의료보험체제의 모델이 된 청십자 의료보험제를 도입했던 사건 등.. 지금보다 많은 것이 모자랐고 불편했던 그 시절 장박사는 자신의 몫을 떼어 못가진 자들의 부족함을 메우려 했다. 자신을 위한 풍요는 그에게 죄악이었다. 지난 95년 그의 장례식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눈물을 떨궜다. 남녘에 변변한 피붙이도 없건만 헤아릴 수 없게 많은 이들이 찾았다. 비록 추도사를 읽는 명사들 처럼 번듯한 차림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진솔한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의 인술을 통해 새 삶을 살게된 과거의 영세민과 행려병자들 이었다. 어쩌면 그에게 희생과 봉사는 천직이었는지 모른다. 의술 하나로 병들고 가난한 이들에게 등불이 되었던 사람. 장기려 박사는 원래 엔지니어가 꿈이었다. 집안형편으로 중국 유학이 좌절된 그는 학비가 적은 경성의전(서울의대)을 마친 뒤
      • 기독교 신앙을 삶에 실천하겠다는 평소 소신에 따라 평양 기독병원 근무를 자원했다. 평양도립병원장과 김일성대학 교수를 역임한 그는 51년 1월 아내 김봉숙과 5남매를 북에 남긴 채 차남만 데리고 남하했다. 그리고 40여년 간 그는 수절했다. 수많은 유혹이 있었으나 그는 “내 반쪽은 단 한사람”이라며 모두 거절하고 수절했다. “의사는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그는 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에 조용히 숨을 거뒀다. 그가 주의 부르심을 받고 5년이 되어 차남이 그를 대신해 북녘의 그의 아내를 만날 수 있었다. 평생 무 소유의 삶을 지향했던 우리 시대의 성자 장기려는 소천 직전 이같이 말했다. “죽었을 때 물레밖에 남기지 않았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아.....” 주기 보다는 먼저 받을려고 하는 이 시대 그의 삶은 얼마나 맑게 빛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