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종교

바보야 / 김수환 추기경 생애 동영상 & 화보

Veronica Kim 2011. 11. 7. 14:48

 

 

 

바보야 (2011) :1부




바보야 (2011) : 2부

 

 

< 김수환 추기경 생애 화보 > 


 
1934년 2월 대구 성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 학생들
(지금의 초등학교 5,6학년.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추기경)



 
1951년 9월 15일 사제 서품식 후 어머니와 함께

“1951년 9월15일. 이날 나는 주님의 부르심에 ‘세상에서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겠노라’는 결정적인 대답을 한 것이다. …

그해 69세이셨던 어머니는 ‘자식이 신부가 되는 게 소원’이었던 당신의 꿈이 이루어지는 가슴 벅찬 순간을 맨 앞자리 마룻바닥에 꿇어앉은 채 지켜보고 계셨다. 식순에 따라 나는 두 손을 모아 이마를 받친 자세로 마루에 엎드렸다. 성가대와 선배 신부들이 불러주는 성인 열품 도문(성인 호칭 기도)의 성스러운 메아리가 성당을 맴돌 때, 주님께서 내 안에 들어와 자리하실 수 있도록 나는 내 마음을 비워 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중앙일보> 1981.9.22)



 
1951년 군종신부로 입대하는 형님 김동한 신부와 함께(대구 주교관 앞)

“우리는 세 살 터울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 형님이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신학교에 갈 때까지는 떨어져 본 일이 없다 싶을 만큼 형제요 동무였다. 나도 형님 따라 2년 후에 신학교에 갔다. 그 후로 학교에서는 먼발치에서 보았고, 방학 때는 언제나 함께 지냈다. … 형님은 6・25 전쟁 동안 해군 군종신부로 입대하여 5~6년 봉사하고 중령으로 제대하셨다”(<고 김동한 신부 추모 문집>, 1993.8.5)



 
1951년 지학순 주교와 함께(원주교구청)



 
1955년 3월 어머니 故서중하 여사의 장례 미사 중 고별식

“어머니는 나를 낳고 기르셨을 뿐 아니라 공부를 시키고 내가 성직의 길로 가게 한 분이시다. 형과 내가 군위 보통학교에 다닐 때 한 번은 어머니가 당신 친정이 있는 대구에 다녀오셨다. 짐작컨대 어머니는 거기 계시는 동안 성당에서 사제수품의 장엄한 예식을 보고 오신 것 같다. 그때 어머니는 감명을 깊이 받으신 모양으로, 돌아오자마자 우리 둘에게 너희는 이다음에 신부가 되라고 이르셨다. … 내 마음에 새겨진 우리 어머니의 영상을 늙으신 모습이다. 이마에 주름이 잡혀 있고 70여 년의 풍상을 겪으신 그런 모습이다. 남편과 자식들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비우고 또 비우신 분. 그러나 근엄하면서도 미소도 지으시는 모습이 떠오른다. … 우리 어머니는 연세가 많아지실수록 얼굴이 더 밝아지고 미소가 많아지셨던 것 같다. 차츰차츰 삶을 믿음 속에 받아들이고 초탈해지셨기 때문일까? 혹은 당신이 원하신 대로 아들 둘을 신부로 만드시고 뜻을 다 이루셨기 때문일까? 또는 귀여운 손자 손녀들 때문이었을까? 우리 어머니는 충분히 그 자질을 갖추셨으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피어나지 못하셨던 분, 자식들을 피어나게 하기 위해 당신은 밑거름이 되신 분이었던 것 같다. … 우리 어머니는 당신이 원하시던 대로 아들 둘이 신부 되는 것을 보시고 4년 가까이 신부인 나를 위해 함께 사시며 기도로써 도와주시다가 1955년 3월에 향년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샘이 깊은 물> 1984.11)



 
1966년 5월 31일 주교 성성식(마산교구 성지여고-입장)



 
1966년 5월 31일 주교성성식(마산교구 성지여고-퇴장)


 
1968년 5월 28일 대주교 착좌 축하연에서 전 교구장인 노기남대주교와 인사하시는 모습


 
196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 착좌

“교회는 주일만의 교회가 아니라 생활 속에 교회와 신앙을 뿌리박고 교회 안에 사회를 심어 주고 성직자는 교회 안에 교회를 심어 주어야 합니다. 현재까지 우리나라 천주교는 신앙을 구하러 교회에 찾아오는 방식이었으나 앞으로는 사회 속으로 찾아가는 자세로 교회를 이끌도록 하겠습니다” (<경향신문> 1968.4.29)



 

1969년 4월 추기경 서임(로마)



 

1969년 4월 추기경 서임식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게서 추기경 반지를 받는 모습(로마 베드로 대성전)

“(추기경 임명 소식을 처음 들은 곳은) 일본 후지산 기슭에 있는 ‘작은 자매회’ 수련원에서였지요. 죠치대학 재학 시절의 은사였던 게페르트 신부님께서 전화로 알려주었습니다. 그 때 제가 처음으로 한 말은 ‘임파서블’(불가능하다)이라는 한마디였습니다. 교회 일로 로마에 들렀다가 일본을 거쳐서 귀국하는 길에 공항에 나가기 위해 택시에 오르기 직전이었습니다. 택시 속에서도 반신반의하면서 1킬로미터 아래쪽에 위치한 성신학교 수도원에 도착했습니다. 신자들이 꽃다발을 안겨 주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실감으로 느껴졌습니다” (<주간조선> 1969.4.6 인터뷰)



 
1969년 5월 19 서임식 후 귀국

“오늘 제가 추기경이 되어 온 것은 나 개인이 훌륭하고 덕망이 높아서가 아니고 200년 한국 천주교사 속에 천주를 위하여 피 흘린 수많은 선열들의 피와 그 얼이 우리 위해 꽃을 피운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 한국 교회가 세계와 나란히 발전하고 있으며 세계 속에서 그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증거로서 나 혼자만의 영광이 아니라 80만 교우 전체의 영광인 동시에 한국민 전체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이 영광은 나 개인에게가 아니고 국민 모두에게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의 이 같은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나의 책임이 얼마나 크고 중한가를 재삼 절감치 않을 수 없습니다. 교황 성하의 한국 교회에 대한 기대와 한국 사회가 바라는 희망에 따라 교회 발전과 아울러 조국의 번영을 위해 나의 모든 힘을 다 바칠 각오를 합니다”



 

1972년 5월 14일 김대건신부 동상 제막식(절두산)

 

1972년 8월 9일 7.4남북공동성명과 8.3긴급조치에 메시지 발표

"본인은 7・4 남북 공동 성명과 8・3 긴급 재정 명령 등으로 소연한 현 시국에 즈음하여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여 국민의 각오와 시국에 대처할 태세 정비를 촉구하는 뜻에서 다음과 같은 소신을 밝히는 바이다. 1. 우리는 7・4 공동 성명이 영구히 전쟁 수단을 포기하고 대화로써 조국의 통일을 달성하는 디딤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남북의 정치가들이 이 약속을 성실히 지키기를 간곡히 부탁하고, 이것을 평화를 위장한 전쟁 준비의 수단이나 권력 정치의 기만전술로 이용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민족과 더불어 엄숙히 경고한다. 2. 최근에 실시된 8・3 긴급재정명령으로 야기된 현실 앞에서, 정부의 보호와 특혜에도 불구하고 국가 경제를 이 지경에까지 몰아붙인 책임 있는 기업인들에게 국민의 이름으로 엄중히 문책함과 동시에, 경제 제일주의를 표방한 정부가 국가를 파산지경에 이르도록 무책임하게 영도해 온 데 대하여 피를 바쳐 나라를 지키고 땀을 바쳐 봉사해 온 모든 애국 시민의 이름으로 엄중히 항의하고 맹성을 촉구한다. 3. 국민이 개인으로나 단체로서 국가 생활과 국가 통치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끔, 언론・출판・집회・결사・신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공명한 선거와 균등한 기회와 안정된 환경을 확보하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만이 남북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는 담보임을 우리는 굳게 믿는다“ (<현 시국에 관한 메시지>, 1972.8.15)



 
1974년 7월 23일 지학순주교의 양심선언 현장에 함께 한 김추기경

“‘이분의 삶을 지배하였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하고 묻는다면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인간에 대한 사랑, 나라와 겨레에 대한 애국 애족심이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 지 주교님이 유신 독재에 항거하여 일어선 동기는 남달리 강하게 지니셨던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분은 고통 받는 이가 누구이든지, 신자 비신자 관계없이 이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으며 그들을 위하여 무언가를 해주지 않고서는 마음이 편치 못한 성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특히 가난과 고통이 본인의 탓이라기보다 억압 정치와 구조 악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에 대한 지 주교님의 의분은 불과 같았고 정의를 위해 개혁을 위해 결연히 일어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학순 주교 장례미사 강론, 1993.3.16)

긴급조치 1호・4호 위반 혐의로 7월6일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지학순 주교는 이날 ‘양심 선언’을 하였고, 8월에 다시 투옥되었다.




 
1975년 5월 목동 무허가촌 인근에 설립한 _협조의 집_방문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는 1975년 4월 목동의 무허가 동네에 ‘협조의 집’을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나는 서울에 온 뒤에도 예수의 작은 자매들이 사는 곳에서 수녀님들을 자주 뵈었습니다. … 나는 이 수도회를 찾을 때마다 다른 수도회와 다른, 매우 소박하고 아주 진정 어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뤼자 아우구스티나 수녀님께 보낸 서한, 1998.6.18)



 
1976년 9월 15일 사제서품 25주년 축하연에서


 
1977년 4월 7일 양평동 철거민촌 복음자리 방문


 
1977년 4월 7일 철거를 앞둔 양평동 판자촌 _복음자리_에서 마지막으로 미사집전



 
1978년 3월 명동성당에서 단식 농성 중인 동일방직 여공들을 위로

“우리가 언론 기능, 곧 언론 자유의 회복을 특별히 기도의 목표로 설정한 데는 오늘의 언론 현실이 우리의 일상 체험에서나 특히 근래에 직접 보고 듣고 겪기까지 한 사건 즉 동일방직 사건에서 언론의 자유의 부재를 너무나 절감하였기 때문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126명이나 되는 여성 근로자들이 해고되었고, 또 그 와중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구속・입건되는 사태까지 빚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회의 공익을 위해서 존재하고, 여론 형성의 큰 영향력을 가진 주요 일간지와 방송 미디어들이 오늘까지 한마디도 여기에 관해서 보도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의 평화를 위한 기도회 강론, 1978.6.5)


 
1980년 11월 친지 방문

 

 



 
1981년 5월 3~6일 마더 데레사 수녀 방한

“사람들은 데레사 수녀님이 증거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떤 사랑이줄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다. 그분이 들었던 ‘사랑의 등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안다. 문제는 그 사랑을 얼마나 충실하게 실천하느냐이다. 모든 사람이 데레사 수녀님처럼 사랑을 실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랑은 큰 사랑만 있는 게 아니다.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위해 기도해주고, 옆 사람에게 따뜻한 미소 한번 지어 보이는 것도 사랑이다. 마음에서 미움을 털어 버리고 화해하는 것도 사랑이다. 그런데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하려면 기도해야 한다.”



 
1981년 10월 18일 조선교구설정 150주년 미사(여의도)

 
1981년 도자기공장 방문

 
1982년 3월 1일 구로 기계공구 상업단지 미사

 
1982년 5월 4일 회갑 축하연(뉴욕 퀸즈성당)

 
1982년 9월 14일 애덕의 집 방문

 
1983년 10월 13일 버마아웅산 추모미사

 
1984년 뿌리깊은나무 인터뷰 중

 
1985년 8월 27~29일 사북탄광에서의 현장 체험

추기경은 가난한 사람 속에 현존하는 하느님을 만나는 현장 생활 체험, 즉 아시아 사회 주교 연수회(BISA)의 일환으로 사북 탄광을 찾았다. “피상적으로 듣고 보았던 현실보다 현장의 어려움은 너무 심각했습니다. … 교회의 제반 여건이 그들과 무관하지 않으면서도 그들과 거리가 멀어진 삶을 살고 있어 현장 생활 체험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기회는 우리 주교 자신들에게 커다란 반성의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현재 교회 공동체가 진정한 공동체인가 자문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주교는 물론 성직자・평신도들에게까지 현장 생활 체험이 확산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가톨릭 신문> 1958.9.15 인터뷰)



 
1985년 11월 13~18일 한국 주교단 교황청 정기방문(로마)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1985년 안양 라자로 성당에서 김기창 화백과



 
1986년 8월 16일 설악산 등산


 
1986년 11월 3일 시국미사(명동대성당)



 
1987년 6월 29일  6.29선언발표날 아침 미사하시는 모습



 
1987년 10월 23일 22사단 방문


 

1987년 11월 11일 가톨릭 농민회 회원들의 삭발 단식 농성장 방문

 
1987년 7월 28일 시흥2동 산사태 이재민 방문


 
1988년 5월 29일 미리내 성지에서 둔촌동 복사 어린이들과



 
1988년 6월 10일 부산 월남난민보호소 방문



 
1988년 9월 21일 신월동 SOS청소년 마을 준공식



 
1989년 10월 8일 제44차 세계성체대회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여의도)



 
1990년 4월 21일 장애인을 위한 한마음 한몸 대행진(올림픽 공원)



 
1990년 4월 21일 한마음 한몸 대행진 행사에서(올림픽 공원)



 
1990년 6월 16일 출소자들의 재활공동체인 금호동 평화의 집 방문

 

 


 
1991_1_19_북한망명학생들과 함께


 
1992_7_20_여주 복자 수련원 방문

 
1992_07_26_남가주 한인 성령 기도회 후
 
1992_11_2~5_교구청내 단합대회에서(제주도)


 
1993_03_21_우리밀 회원모집을 위한 시민시식회에서


 

 
1993_03_31_생가방문(경북 군위군)

“5남 3녀의 막내로 내가 태어난 곳은 대구시 남산동. 그러나 그곳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다섯 살 때 큰누나가 옹기 장사를 하기 위해 경북 군위로 이사를 했는데 그곳이 바로 내 유년기의 요람으로 그곳에서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살다가 대구로 이사를 했다. 군위에서의 내 유년기는 그대로 가톨릭과의 생활이었다. 당시는 일제 때였으나 종교의 자유는 있어서 큰 도시에는 성당도 있었고, 시골 같은 성당과 신부가 없는 곳에서는 신자들이 어떤 한 집을 공소로 정해 그곳에서 신자들끼리 주일 미사를 드리곤 했다. 우리 집이 바로 공소였다. 공소 예절을 이끌어 가는 사람은 다른 어른이었으나 아버지가 고집해 우리 집을 공소로 내놓으셨다”(<중앙일보> 1981.9.22)

“나는 대구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 자라기는 선산과 군위에서였고, 내 위의 형들과 누이들도 대개 태어난 곳이 같지를 않다. 우리는 모두 8남매였는데 충남 합덕에서 시작하여 대구, 칠곡, 김천 이렇게 태어난 곳이 다르다. 우리 아버지 고향은 원래 충남 연산이지만 거기서는 박해 시대에 이미 쫓겨나셨고, 친척도 아는 이도 전혀 없다. 그러니 고향의 정감이 가지를 않는다. 그보다는 경상도에, 그중에서도 대구에서 산 적이 시간적으로도 더 많으니 우리는 모두 대구가 고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샘이 깊은 물> 1984.11)



 
1993_04_16_성공회관구장취임식


 
1993_08_03_소록도방문


 
1993_08_06_대전 expo 바티칸관 개관미사


 
1993_08_18_대청봉에서


 
1993_09_16_형님 故김동한 신부님 10주기 미사(대구 성직자 묘소)

“우리 형님이 가신 지가 10년이 되는데도, 아직도 많은 분들이 그분을 잊지 못하고 계신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형님은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추구하는 부귀와 권세를 누린 분은 물론 아니고, 외적으로 보이는 업적을 크게 남기신 분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많은 분들이 그분을 잊지 못하는 것은 이분의 사랑의 삶 때문일 것입니다. 오로지 가난하고 병든 이들, 특히 결핵 환자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사랑하셨고 봉사하셨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신부님이 지니셨던 그 사람의 마음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에, 또 그 마음을 나누어 가지고 싶어서 이렇게 10주년을 추모하는 자리에 오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일 미사 강론)


 
1993_10_24_6지구(도봉, 강북구지역) 체육대회 참가


 
1993_11_29_영등포 구치소 직원과 재소자, 후원자들과 함께


 
1993_12_24_사당동_사랑의손공동체_(장애인단체)성탄미사


 
1994_04_24_외국인 노동자들과의 미사 후(명동성당)

“필리핀의 전 대통령이신 코라손 아키노 여사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저는 이곳에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미사를 드리겠노라고 약속한 바가 있습니다. … 여러분들은 고향과 가족을 두고 여러분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머나먼 나라인 한국으로 떠나 왔습니다. 여러분은 때로는 향수병으로,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있음으로 해서 힘드시라고 생각합니다. … 설상가상으로 여러분은 때때로 부당하거나 혹독한 대우를 받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끔찍한 일이며, 저는 그와 같은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길 바라고 기도합니다” (당일미사 강론)


 
1994_05_29_안동교구 25주년 행사


 
1994_06_30_서울 지하철 노조 파업 농성장 방문(명동성당)


 
1994_08_15_평화통일 기원대회에서(임진각)


 
1994_12_09_서울구치소방문


 
1995_01_01_세배객 맞이 (명동 교구청 집무실)


 
1995_06_03_충주 성모학교 장애학생 야영대회


 
1995_06_05_동국대 불교학과생들과의 만남_천주교 서울대교구청


 
1995_07_13_우리 농촌 살리기 1주년 미사 후(명동 가톨릭 회관)


 
1995_07_16_ 서초동성당에서 삼풍백화점 사고로 자녀를 잃은 여인을 위로

“우리는 외양으로는 그럴싸하게 화려하게 큰 집을 짓고 새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모래 위에 지은 사상누각에 불과하였습니다.…우리가 좀 더 정직하였더라면, 좀 더 성실하고 책임감이 있었더라면, 돈보다는 사람을 먼저 생각할 줄 알았더라면,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거나 망해 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루가 9,25)고 하신 복음 말씀대로 인간과 인간 생명이 모든 가치 중에서 제일간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살아왔더라면, 그리고 누구보다도 우리 정치인과 경제인들에게 이런 인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돈이나 권력에 대한 욕망에 앞서 있었더라면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희생자를 위한 미사 강론, 1995.7.16.)


 
1995_09_12_가톨릭대학교에서 열린 _열린음악회_ 출연


 
1995_12_03_영화_아름다운 청년 전태일_ 관람 후 전태일 모친 이소선여사와 함께 (서울극장)


 
1996_03_09_군종센터 축복식에서 휘호(대전 계룡대)


 
1996_04_14_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축제(명동성당)


 

 
1996_04_23_독도 위로 방문


 
1996_06_14_시각장애인 평생타운 건립을 위한 음악회에서 가수 인순이씨와 (잠실 롯데월드)


 
1996_06_23_남북통일기원미사 후 (까치봉)


 
1996_08_20_문산본당수해현황보고


 
1996_12_21_장애인과 함께하는 사랑의 밤 행사에서


 
1997_01_01_전진상교육관방문


 
1997_04_12_우리 민족 서로 돕기 모금을 위한 만찬장(63빌딩)에서 굶주리는 북한동포의 고통을 체험하기 위해 옥수수죽을 드시는 김추기경님

‘북한의 식량 위기를 염려하는 사회 각계 인사 만찬’에서 굶주리는 북한 동포의 고통을 체험하기 위하여 옥수수 죽을 들고 있다. “지금 이 시대에 최대의 민족 운동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아사 위기에 처한 북쪽의 동포를 돕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치고 뜻을 합합시다. 우리 다시 북녘 동포를 살리고 또 우리 자신 이 땅을, 갈라진 이 땅을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는 땅으로 변화 시킵시다”(인사말)


 
1997_04_15_용인에버랜드에서 여학생들과 함께


 
1997_04_20_예술의전당에서 최인호씨와 (겨울나그네 오페라)


 
1997_12_23_효경원에서 성탄미사


 
1997_12_24_행당동 철거민촌 방문


 
1998_01_12_금모으기 행사 (YWCA)


 
1999_04_20_한반도 평화를 위한 동북아시아 추계 평화 회의(수유리 크리스찬 아카데미)


 
1999_06_06_가톨릭대 교정에서 전국가톨릭고등학생과 만남


 
2000_05_27_산책(혜화동 주교관앞)


 
2000_07_04_운보 김기창 회백 미수기념 특별전 관람(조선일보 미술관)


 

 
2000_10_15_음성 꽃동네 방문


 
2000_12_27_백건우,윤정희 부부 내방

 

 


 
2001_05_19_한국 주교단 사도좌 정기방문중 요한 바오로2세와


 
2001_06_27_추기경님 팔순 및 전집 출판 기념회


 
2001_12_22_성심수녀회 만찬


 
2002_01_12_KBS2TV어린이뉴스탐험 인터뷰


 
2002_12_25_필리핀 근로자를 위한 성탄 미사(혜화동성당)


 
2003_01_01_세배돈 주시는 추기경님


 
2003_03_11_살레시오의집 방문


 
2003_06_22_민족화합의 대미사 후 도라산 역 전망대에서


 

 
2003_07_23_성가복지병원 방문


 
2005_01_13_가수 보아 내방(혜화동 집무실)


 
2005_04_08_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장례미사 집전


 
2005_05_15_석탄일_길상사 음악회


 

 
2005_05_15_성가정입양원 방문


 
2005_05_29_성라자로 마을에서 미사


 
2005_12_04_생명의 날 미사(생명위원회 주최)

오늘 여기에 오신 분들 면면을 보더라도 생명미사의 중요함을 느낀다. 여러분들 스스로 깨닫듯이 생명은 대단히 소중하다. 예수께서도 "사람이 자기 목숨을 잃으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얻는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느냐"(마태16,26)고 하셨다.
인간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이다. 이 생명은 예수님 말씀대로 세상 모든 것과도 바꿀 수없는 그런 가치의 것이다. 구체적으로 생명은 수태 순간부터 성심껏 보호돼야 하고 교회는 교리로 이를 가르쳐왔다.
그런데 오늘날 불행하게도 귀한 생명의 소중함을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 많은 생명이 이 땅에서 죽어가고 있다. 낙태가 그렇고 교통사고로 죽는 건수가 세계에서 제일 높은 것이 그렇고, 이보다 수적으로 더 많아지는 자살이 그렇다.
생명 존엄과 그 가치를 모르면 이는 인간으로서 기본 가치를 모르는 것이다. 인간 존중, 인간 사랑이 없는 곳엔 삶의 가치도, 의미도 없다. 이런 사회는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다. 우리는 지금 생명이냐, 죽음이냐 갈림길에 서 있다. 참으로 깊이 반성해 봐야 할 것이다.
생명은 어머니 뱃속 잉태 순간부터 시작되고 작은 배아도 인간이다. 생명운동이 전 교회와 사회로 확산되길 바란다(2005. 12. 4 생명미사 축사 요약).


 
2006_02_22_정추기경 서임발표후 명동주교관 앞에서

 
2007_02_09_세계 병자의 날_개막미사(명동성당)

 

<2009년 2월 16일 선종하셔서 명동성당에 누워 계신 모습>

 

 

◇ 20일 오전 명동성당 대성전에서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거행된 고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미사에서 고별식이 거행되고 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 20일 오전 명동성당 대성전에서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거행된 고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미사가 거행되고 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 20일 오전 명동성당 대성전에서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거행된 고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미사가 거행되고 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 20일 오전 명동성당 대성전에서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거행된 고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미사에서 고별사가 낭독되자 장례미사에 참석한 수녀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 20일 오전 명동성당 대성전에서 거행된 고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미사에서 고 김수환 추기경의 영정과 관이 명동성당을 나오고 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감사합니다” 김 추기경 육성에 눈물바다

◇ 고 김수환 추기경의 영정과 관이 명동성당 대성전의 문을 나오고 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 고 김수환 추기경의 영정과 관이 명동성당 앞마당을 지나고 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 고 김수환 추기경의 관이 운구차에 실리고 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 고 김수환 추기경의 관이 실린 운구차가 장지로 출발하자 오열하던 추모객들이 운구차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