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_1_19_북한망명학생들과 함께
1992_7_20_여주 복자 수련원 방문
1992_07_26_남가주 한인 성령 기도회 후
1992_11_2~5_교구청내 단합대회에서(제주도)
1993_03_21_우리밀 회원모집을 위한 시민시식회에서
1993_03_31_생가방문(경북 군위군)
“5남 3녀의 막내로 내가 태어난 곳은 대구시 남산동. 그러나 그곳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다섯 살 때 큰누나가 옹기 장사를 하기 위해 경북 군위로 이사를 했는데 그곳이 바로 내 유년기의 요람으로 그곳에서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살다가 대구로 이사를 했다. 군위에서의 내 유년기는 그대로 가톨릭과의 생활이었다. 당시는 일제 때였으나 종교의 자유는 있어서 큰 도시에는 성당도 있었고, 시골 같은 성당과 신부가 없는 곳에서는 신자들이 어떤 한 집을 공소로 정해 그곳에서 신자들끼리 주일 미사를 드리곤 했다. 우리 집이 바로 공소였다. 공소 예절을 이끌어 가는 사람은 다른 어른이었으나 아버지가 고집해 우리 집을 공소로 내놓으셨다”(<중앙일보> 1981.9.22)
“나는 대구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 자라기는 선산과 군위에서였고, 내 위의 형들과 누이들도 대개 태어난 곳이 같지를 않다. 우리는 모두 8남매였는데 충남 합덕에서 시작하여 대구, 칠곡, 김천 이렇게 태어난 곳이 다르다. 우리 아버지 고향은 원래 충남 연산이지만 거기서는 박해 시대에 이미 쫓겨나셨고, 친척도 아는 이도 전혀 없다. 그러니 고향의 정감이 가지를 않는다. 그보다는 경상도에, 그중에서도 대구에서 산 적이 시간적으로도 더 많으니 우리는 모두 대구가 고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샘이 깊은 물> 1984.11)
1993_04_16_성공회관구장취임식
1993_08_03_소록도방문
1993_08_06_대전 expo 바티칸관 개관미사
1993_08_18_대청봉에서
1993_09_16_형님 故김동한 신부님 10주기 미사(대구 성직자 묘소)
“우리 형님이 가신 지가 10년이 되는데도, 아직도 많은 분들이 그분을 잊지 못하고 계신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형님은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추구하는 부귀와 권세를 누린 분은 물론 아니고, 외적으로 보이는 업적을 크게 남기신 분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많은 분들이 그분을 잊지 못하는 것은 이분의 사랑의 삶 때문일 것입니다. 오로지 가난하고 병든 이들, 특히 결핵 환자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사랑하셨고 봉사하셨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신부님이 지니셨던 그 사람의 마음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에, 또 그 마음을 나누어 가지고 싶어서 이렇게 10주년을 추모하는 자리에 오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일 미사 강론)
1993_10_24_6지구(도봉, 강북구지역) 체육대회 참가
1993_11_29_영등포 구치소 직원과 재소자, 후원자들과 함께
1993_12_24_사당동_사랑의손공동체_(장애인단체)성탄미사
1994_04_24_외국인 노동자들과의 미사 후(명동성당)
“필리핀의 전 대통령이신 코라손 아키노 여사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저는 이곳에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미사를 드리겠노라고 약속한 바가 있습니다. … 여러분들은 고향과 가족을 두고 여러분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머나먼 나라인 한국으로 떠나 왔습니다. 여러분은 때로는 향수병으로,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있음으로 해서 힘드시라고 생각합니다. … 설상가상으로 여러분은 때때로 부당하거나 혹독한 대우를 받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끔찍한 일이며, 저는 그와 같은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길 바라고 기도합니다” (당일미사 강론)
1994_05_29_안동교구 25주년 행사
1994_06_30_서울 지하철 노조 파업 농성장 방문(명동성당)
1994_08_15_평화통일 기원대회에서(임진각)
1994_12_09_서울구치소방문
1995_01_01_세배객 맞이 (명동 교구청 집무실)
1995_06_03_충주 성모학교 장애학생 야영대회
1995_06_05_동국대 불교학과생들과의 만남_천주교 서울대교구청
1995_07_13_우리 농촌 살리기 1주년 미사 후(명동 가톨릭 회관)
1995_07_16_ 서초동성당에서 삼풍백화점 사고로 자녀를 잃은 여인을 위로
“우리는 외양으로는 그럴싸하게 화려하게 큰 집을 짓고 새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모래 위에 지은 사상누각에 불과하였습니다.…우리가 좀 더 정직하였더라면, 좀 더 성실하고 책임감이 있었더라면, 돈보다는 사람을 먼저 생각할 줄 알았더라면,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거나 망해 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루가 9,25)고 하신 복음 말씀대로 인간과 인간 생명이 모든 가치 중에서 제일간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살아왔더라면, 그리고 누구보다도 우리 정치인과 경제인들에게 이런 인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돈이나 권력에 대한 욕망에 앞서 있었더라면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희생자를 위한 미사 강론, 1995.7.16.)
1995_09_12_가톨릭대학교에서 열린 _열린음악회_ 출연
1995_12_03_영화_아름다운 청년 전태일_ 관람 후 전태일 모친 이소선여사와 함께 (서울극장)
1996_03_09_군종센터 축복식에서 휘호(대전 계룡대)
1996_04_14_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축제(명동성당)
1996_04_23_독도 위로 방문
1996_06_14_시각장애인 평생타운 건립을 위한 음악회에서 가수 인순이씨와 (잠실 롯데월드)
1996_06_23_남북통일기원미사 후 (까치봉)
1996_08_20_문산본당수해현황보고
1996_12_21_장애인과 함께하는 사랑의 밤 행사에서
1997_01_01_전진상교육관방문
1997_04_12_우리 민족 서로 돕기 모금을 위한 만찬장(63빌딩)에서 굶주리는 북한동포의 고통을 체험하기 위해 옥수수죽을 드시는 김추기경님
‘북한의 식량 위기를 염려하는 사회 각계 인사 만찬’에서 굶주리는 북한 동포의 고통을 체험하기 위하여 옥수수 죽을 들고 있다. “지금 이 시대에 최대의 민족 운동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아사 위기에 처한 북쪽의 동포를 돕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치고 뜻을 합합시다. 우리 다시 북녘 동포를 살리고 또 우리 자신 이 땅을, 갈라진 이 땅을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는 땅으로 변화 시킵시다”(인사말)
1997_04_15_용인에버랜드에서 여학생들과 함께
1997_04_20_예술의전당에서 최인호씨와 (겨울나그네 오페라)
1997_12_23_효경원에서 성탄미사
1997_12_24_행당동 철거민촌 방문
1998_01_12_금모으기 행사 (YWCA)
1999_04_20_한반도 평화를 위한 동북아시아 추계 평화 회의(수유리 크리스찬 아카데미)
1999_06_06_가톨릭대 교정에서 전국가톨릭고등학생과 만남
2000_05_27_산책(혜화동 주교관앞)
2000_07_04_운보 김기창 회백 미수기념 특별전 관람(조선일보 미술관)
2000_10_15_음성 꽃동네 방문
2000_12_27_백건우,윤정희 부부 내방
2001_05_19_한국 주교단 사도좌 정기방문중 요한 바오로2세와
2001_06_27_추기경님 팔순 및 전집 출판 기념회
2001_12_22_성심수녀회 만찬
2002_01_12_KBS2TV어린이뉴스탐험 인터뷰
2002_12_25_필리핀 근로자를 위한 성탄 미사(혜화동성당)
2003_01_01_세배돈 주시는 추기경님
2003_03_11_살레시오의집 방문
2003_06_22_민족화합의 대미사 후 도라산 역 전망대에서
2003_07_23_성가복지병원 방문
2005_01_13_가수 보아 내방(혜화동 집무실)
2005_04_08_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장례미사 집전
2005_05_15_석탄일_길상사 음악회
2005_05_15_성가정입양원 방문
2005_05_29_성라자로 마을에서 미사
2005_12_04_생명의 날 미사(생명위원회 주최)
오늘 여기에 오신 분들 면면을 보더라도 생명미사의 중요함을 느낀다. 여러분들 스스로 깨닫듯이 생명은 대단히 소중하다. 예수께서도 "사람이 자기 목숨을 잃으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얻는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느냐"(마태16,26)고 하셨다. 인간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이다. 이 생명은 예수님 말씀대로 세상 모든 것과도 바꿀 수없는 그런 가치의 것이다. 구체적으로 생명은 수태 순간부터 성심껏 보호돼야 하고 교회는 교리로 이를 가르쳐왔다. 그런데 오늘날 불행하게도 귀한 생명의 소중함을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 많은 생명이 이 땅에서 죽어가고 있다. 낙태가 그렇고 교통사고로 죽는 건수가 세계에서 제일 높은 것이 그렇고, 이보다 수적으로 더 많아지는 자살이 그렇다. 생명 존엄과 그 가치를 모르면 이는 인간으로서 기본 가치를 모르는 것이다. 인간 존중, 인간 사랑이 없는 곳엔 삶의 가치도, 의미도 없다. 이런 사회는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다. 우리는 지금 생명이냐, 죽음이냐 갈림길에 서 있다. 참으로 깊이 반성해 봐야 할 것이다. 생명은 어머니 뱃속 잉태 순간부터 시작되고 작은 배아도 인간이다. 생명운동이 전 교회와 사회로 확산되길 바란다(2005. 12. 4 생명미사 축사 요약).
2006_02_22_정추기경 서임발표후 명동주교관 앞에서
2007_02_09_세계 병자의 날_개막미사(명동성당)

<2009년 2월 16일 선종하셔서 명동성당에 누워 계신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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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일 오전 명동성당 대성전에서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거행된 고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미사에서 고별식이 거행되고 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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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일 오전 명동성당 대성전에서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거행된 고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미사가 거행되고 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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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일 오전 명동성당 대성전에서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거행된 고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미사가 거행되고 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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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일 오전 명동성당 대성전에서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거행된 고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미사에서 고별사가 낭독되자 장례미사에 참석한 수녀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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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일 오전 명동성당 대성전에서 거행된 고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미사에서 고 김수환 추기경의 영정과 관이 명동성당을 나오고 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 “감사합니다” 김 추기경 육성에 눈물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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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김수환 추기경의 영정과 관이 명동성당 대성전의 문을 나오고 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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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김수환 추기경의 영정과 관이 명동성당 앞마당을 지나고 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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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김수환 추기경의 관이 운구차에 실리고 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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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김수환 추기경의 관이 실린 운구차가 장지로 출발하자 오열하던 추모객들이 운구차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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