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외국 Pop Music

흐르는 강물처럼/미소라히바리

Veronica Kim 2016. 4. 29. 17:27

  [포토]1950년대 초반 사진

 

川の流れのように (카와노나가레노요-니, 흐르는 강물처럼)

美空ひばり(미소라히바리) 


知らず知らず 步いて來た 細く長いこの道
(시라즈 시라즈 아루이테 키타 호소쿠 나가이 코노 미치)
모르게 모르게 걸어 온 가늘고 긴 이 길

振り返れば 遙か遠く 故鄕が見える
(후리카에레바 하루카 토-쿠 후루사토가 미에루)
뒤돌아보면 저 멀리 고향이 보여

でこぼこ道や 曲がりくねった道
(데코보코 미치야 마가리쿠넷타 미치)
울퉁불퉁한 길, 고불고불 구부러진 길

地圖さえない それもまた人生
(치즈사에나이 소레모 마타 진세-)
지도조차 없는 그것도 또한 인생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ゆるやかに
(아- 카와노 나가레노요-니 유루야카니)
아! 강물의 흐름처럼 완만하게

いくつも 時代は過ぎて
(이쿠츠모 지다이와 스기테)
여러 시대는 흘러서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とめどなく
(아- 카와노 나가레노요-니 토메도나쿠)
아! 강물의 흐름처럼 끝없이

空が黃昏に 染まるだけ
(소라가 타소가레니 소마루다케)
하늘이 황혼에 물들 뿐…

- 간주 -

生きることは 旅すること 終わりのない この道
(이키루 코토와 타비스루 코토 오와리노 나이 코노 미치)
살아가는 건 여행하는 것, 끝없는 이 길

愛する人 そばに連れて 夢探しながら
(아이스루 히토 소바니 츠레테 유메 사가시나가라)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 데리고 꿈을 찾으며

雨に降られて ぬかるんだ道でも
(아메니 후라레테 누카룬다 미치데모)
비에 젖어서 질퍽이는 길이라도

いつかはまた 晴れる日が來るから
(이츠카와 마타 하레루 히가 쿠루카라)
언젠가는 또 다시 맑은 날이 올테니…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おだやかに
(아- 카와노 나가레노요-니 오다야카니)
아! 강물의 흐름처럼 평온하게

この身をまかせていたい
(코노 미오 마카세테 이타이)
이 몸을 맡기고 싶어요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移りゆく
(아- 카와노 나가레노요-니 우츠리유쿠)
아! 강물의 흐럼처럼 변해 가는

季節 雪どけを待ちながら
(키세츠 유키도케오 마치나가라)
계절 눈이 녹는 날을 기다리며…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おだやかに
(아- 카와노 나가레노요-니 오다야카니)
아! 강물의 흐름처럼 평온하게

この身をまかせていたい
(코노 미오 마카세테 이타이)
이 몸을 맡기고 싶어요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いつまでも
(아- 카와노 나가레노요-니 이츠마데모)
아! 강물의 흐름처럼 언제나

靑いせせらぎを 聞きながら
(아오이 세세라기오 키키나가라)
푸른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데뷔 초기 모습

후쿠시마 현 이와키 시에 설치된

미소라 히바리 유영비(遺影碑)







 

 

 

 

 



<<美空ひばり(미소라히바리) : 한국계 엔카가수>>

[인물]

미소라 히바리(일본어: 美空 ひばり みそら ひばり, 1937년 5월 29일 ~ 1989년 6월 24일)는

일본의 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이자 여배우로,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 이소고 구에서 태어났다.

세이카 학원(精華?園) 고등부를 졸업했으며, 본명은 가토 가즈에(일본어: 加藤 和枝 かとう かずえ)다.

사후에 일본 여성 최초로 국민영예상을 수상했다.

[전성기]
1949년 7월에 《갓파 부기우기(河童ブギウギ)》를 통해 가수로 데뷔하고,

1960년에 《애수 부두(哀愁波止場)》로 일본 레코드대상 가창상을 수상했다.

1962년에 당시 인기 영화 배우였던 고바야시 아키라와 결혼했지만, 2년 만인 1964년에 이혼하게 된다.

이혼 직후인 1964년 12월에 텔레비전 드라마 《야와라》(柔)의 주제가로 사용된 동명의 곡을 발표해

크게 인기를 얻어 180만 매의 음반을 판매하고, 일본 레코드대상을 수상한다.

곧이어 발표한 1966년의 《가나시이사케(悲しい酒)》는 145만 매,

1967년의 《맛카나타이요(?赤な太陽)》는 140만 매를 판매해 크게 인기를 끌었다.

[후기]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친어머니였던 가토 기미에(加藤喜美枝)가 사망하고, 곧이어 친동생과 친우마저

차례로 사망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인기 또한 전성기와는 다르게 눈에 띄게 떨어져 술과 담배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아졌고, 몸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1987년 4월 22일에 후쿠오카 제생회 병원에 급하게 입원, “만성 간염 및 양측 대퇴골 골두 괴사”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재기 불가능”이라는 평을 받았지만, 수 개월간 요양한 뒤 8월 3일에 퇴원하고,

10월에 신곡 《미다레가미(みだれ?)》를 레코딩 해 복귀한다. 1988년 4월 11일에는 도쿄 돔에서

5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복귀 콘서트 《불사조 ~ 날아라 새로운 하늘을 향해》를 가져 완전 복귀를 선언한다.

하지만 이미 상한 몸으로 인해, 전국 공연을 가지던 도중에도 수차례 극비 입원 하는 등,

위험한 징조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쇼와 천황이 죽으면서 연호가 헤이세이로 바뀐 1989년 1월 11일에는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가와노나가레노요니(川の流れのように)》을 발표한다.

곧 전국 투어 콘서트를 시작하지만, 다시 입원과 일시퇴원을 반복했다.

결국 3월 21일에 자택에서 닛폰 방송에서의 라디오 특집 생방송《미소라 히바리, 감동의 이 한 곡

방송하고 난 뒤 급격히 악화되어 준텐도 병원(順天堂病院)에 입원하게 된다. 이로 인해 이 후 예정되었던

콘서트나 전국투어도 모두 중지되었다. 1989년 6월 13일에 결국 의식불명으로 인공호흡을 시작했고,

6월 24일에 간질성 폐렴으로 인한 호흡부전으로 인해 향년 52세로 사망했다.

그녀는 죽기 마지막 전 자신은 한국인라는 것을 밝혔다.

[사후]

1989년 7월 4일에 일본 여성 최초로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국민영예상을 수상했다.

이 후 7월 22일에 거행된 장례식은 각 방송사에서 생중계를 했고 팬들을 포함해서 4만 2천여명이

조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요코하마 시 고난 구(港南?)에 안장되었다.

이 후에도 수년간 가요제의 특별상 등을 여러차례 수상하였다.

1993년에 교토 시에 “미소라 히바리관”이 개관하였으나, 이용자 수의 감소로 2006년 11월 30일에 폐관되었다.

폐관된 히바리관은 히바리 프로덕션에서 18억 엔에 매입하여, 2008년 봄에 다시 오픈한다고 발표되었다.[1]

2005년에 공개된 영화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에서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복원되어 출연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상영회 등이 각지에서 주기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최후의 곡인 《흐르는 강물처럼》은 NHK에서 조사한 “일본의 명곡”에서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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